이순신의 바다
그 바다는 무엇을 삼켰나
황현필 저
이 책을 1독 하는 동안 드는 생각은
원균과 윤석열이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다시 원균이 등장하는 씬 위주로
다시 1독하면서 정리하고자 한다
1. 이순신이 여수 본진의 전라좌수사로 임명 될 당시
원균은 거제 본진의 경상우수사로 일하고 있었다.
2. 관할지 비교, 전라좌수영은 5관 5포(보성,낙안,순천,광양,흥양)
3. 임진왜란 발발시 원균은 전투 준비가 되지 못해 교전 한번 없이 왜군을 상륙시킴
4. 이순신은 47세 1591년 전쟁준비 1592년 4월 13일(양력 5월 23일) 임진왜란 발발
5. 임란 발발 2일 후 원균이 구원요청을 통해 임란 알게 됨
6. 구원 요청을 받고 선조에게 어떻게 할까요 물으니
"원균과 손을 잡고 적을 물리치면 내가 참으로 기쁘겠다. 다만 상황에 따라서 판단하고 최종 결정은 전라좌수사인 이순신이 하라".
7. 이 당시 전력은 왜군은 100여척 침략, 부산포에 350여척 부산포에 도착등 정확한 전력파악이 되지 못했으나 이순신은 판옥선 24척에 불과했다.
8. 전라우수사 이억기에게 4월 30일까지 여수에서 합류하자고 전갈을 보냈으나 오지 않았다.
9. 임란 발발 20여일이 지난 5월 4일 5000여명의 병사를 이끌고 이순신 함대 출정
10. 선조실록에 따르면 "왜적이 바다를 건너 오자 경상우수사 원균은 대적할 형편이 못된다는 것을 알고 전선과 무기들을 모조리 바다에 가라앉히고 수군 1만여명을 흩어버린 다음 남해현 앞바다에 머물러 있다가 육지에 올라 적을 피하려고 하였다"
11. 이순신이 왔다는 소식에 8관 16포에 숨어있던 원균의 부하들이 나타나 원균의 판옥선은 4척이 되어 28척의 판옥선이 당포항을 5월 6일 출항.
12. 5월 7일 옥포에서 첫 전투, 왜군은 조총과 등선 육박전술을 하려고 하였으나 이순신은 조총 사정거리 50m 밖 일정거리 유지하면서 뱃머리를 90도 돌려서 대포발사 적선에 일시 집중타를 퍼부어 침몰시켰다.
13. 옥포해전에서 왜군 4080명 사망, 전함 26척 침몰
14. 당일 합포에서 또 전함 5척 전파, 490명 사망 시킴
15. 5월 8일 적진포에서 전함 13척 침몰, 2840명 사망
16. 만약 이순신이 전라좌수사가 아니라 경상좌수사나 경상우수사였다면 일본군은 조선땅을 상륙하기도 전에 바다에서 참패하고 일본 열도로 물러났을 것이다. 혹여 일부 부대가 상륙했다 치더라도 전진 기지를 확보하지 못했을 것이고, 육지에 상륙한 일본 육군은 사기 저하와 보급품 부족으로 조선 땅에서 빨치산처럼 살아가다 고사 되었을 것이다. 경상좌수사 박홍과 경상우수사 원균은 부끄러워해야 한다.
16. 옥포파왜병장, 1차 출전 승리 소식을 조전에 알림, 이순신 품계 올라감, 이후 원균은 죽은 적병의 수급 베는일에 집중했으나 이순신은 적의 배를 1척이라도 더 부수고 적군을 1명이라도 더 죽이기 위해 노력하라. 너희들의 공로는 내가 다 보고 알고 있노라.
16. 1차 출정 완료 후 전라우수사에게 다시 사람을 보내 전라우수사 이억기로부터 답장을 받았다. '6월 3일까지 전라좌수영에 당도할 것입니다'.
17. 5월 29일 2차 사천해전 출정, 전함 13척 전파, 2600명 사망
18. 당시 32세의 젊은 전라우수사 이억기가 판옥선 25척을 가지고 합류해서 이순신의 23척 원균 3척 이억기 25척 해서 도합 51척의 연합합대가 구성되었다.
19. 이억기는 32세 종친이며 당항포해전부터 이순신과 함께하며 이순신을 주장으로 인정하고 지지, 이순신 파직시 구명운동 전개, 원균의 악행을 알리기도 했다, 원균의 무능함 때문에 칠천량에서 전사함.
20. 이억기 32세, 이순신 48세, 원균 53세
21. 1592년 6월 5일 당항포해전, 왜군 전선 26척 전파, 2720명 사망
22. 이순신이 조정에 베어 올린 수급보다 원균이 조정에 올려 보낸 수급의 숫자가 더 많아지는 촌극과 오해, 이순신은 판옥선의 숫자는 많지만 조심스럽고 소극적으로 전투를 하는 반면, 원균은 고작 3척의 판옥선을 가지고도 용맹스럽게 활약을 한것으로 생각하는 조정 대신들이 생겨나고 있었다.
23. 1592.6.7 율포해전 전함7척 전파, 500여 명 사망
24. 1592년 7월 6일 3차 출정, 원균의 판옥선은 7척, 연합 함대는 60여척, 왜선은 70여 척, 거제도와 통영 사이에 있는 견내량은 좁은데다 암초가 많은 지형임에도 불구하고 원균은 "무엇을 지체하는 거요? 우리도 돌진합시다!" 원균은 기본적인 병법조차 모르는 것 같아 안타깝다. 견내량을 빠져 나오게 유인한 후 넓은 바다에서 전부 다 수장시키려는 이순신. 결과는 전함47척 침몰, 12척 나포, 9000여명 사망
24. 와키자카는 한산도해전에서 73척의 함대 중 59척이 침목되며 이순신에게 패전하고 10일간 한산도에서 미역만 먹고 목숨 부지. 지금도 매년 7월 8일에는 다른 음식 삼가고 미역만 먹는 전통이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25. 7월 10일 안골포해전 전함 20여척 침몰, 3960명 사망
26. 선조의 부산포 공격 명령, 8월 1일부터 23일까지 전라 좌우수영 연합 훈련, 24일 4차 출정, 한산도해전 이후 토요토미는 조선 수군과 교전 금지 및 무조건 도망가라는 지시, 장림포에서 6척 격침 480명 사망, 화준구미에서 5척 수장 500명 사망, 다대포에서 8척 격침 590명 사망, 서평포에서 9척 1000명 사망, 절영도에서 2척 1200명 사망, 초량목 전함4척 전파 380명 사망,
27. 9월 1일 부산포해전 전함 128척 침몰, 3834명 사망, 1200명 부상
28. 1592년 9월 1일 부산포해전 승리, 양력 계산하면 10월 5일, 부산시민의 날로 지정함
29. 1593년 1월 평양탈환, 선조가 출정명령서 장계를 3번이나 보낸다. "해군들을 남김없이 이끌고 적을 모조리 무찌름으로써 적의 배 1척도 돌아가지 못하게 하라" 견내량에서 이억기, 원균, 이순신 서로 만나기로 했는데 전라우수사 이억기가 좀 늦었다고 불같이 화냄, 조정에서 오해, '원균은 항상 일본과 먼저 싸우려 했으나 이순신과 이억기는 신중했다'
30. 1593년 2월 10일 ~ 3월 6일, 전라좌수영 판옥선 40척, 전라우수영 42척, 경사우수영 7척 포작선 다수 해서 조선함대는 300척, 일본은 500여척 정도. 웅포해전에서 전함51척 침몰, 2500명 사망, 그러나 웅천왜성을 점령하지는 못했다.
31. 임진년 일본군 22만 병력, 1593년 10만 명에 불과. 1년 동안 12만명 사망
32. 1593년 7월 본영을 여수에서 한산도로 이전.
33. 전쟁 발발 후 16개월 만인 1593년 8월 15일에 이순신을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 전라 경상 충청도의 모든 수군 통제.
34. 이때까지도 명군의 해군은 참여하진 않은 상태, 육군은 명나라 육군의 명령을 따를 수 밖에 없는 처지.
35. 왜성을 쌓고 있는 남부에 4만의 일본 병력, 1593년은 휴전분위기
36. 1594년 3월 남해안의 적을 공격하라는 조정의 명령, 조선 함대는 124척의 판옥선, 당항포해전에서 전함 31척 전파, 4100명 사망
37. 1954년 3월 전염병 창궐, 이순신 장군도 4월 9일까지 전염병에 감염되어 꼼짝없이 누워 있었다고 난중일기에 기록되어 있음
38. 명나라의 패문 '왜군을 공격하지 말라', 남해 곳곳의 왜성때문에 토벌이 녹록치 않은 상황
39. 조선 수군 전체는 6000 ~ 7000명 정도인데 반해 남해 바다에 산재해 있는 일본군은 4만명, 남해안에 30개에 가까운 왜성, 선제 공격이 불가능해 보인다고 결론을 내리고 있는 상태
40. 이때 새로운 도체찰사 윤두수가 일본 왜성에 대한 선제공격 건의, 류성룡 반대, 선조는 윤두수 편드는 이유는 원균이 이순신을 건너뛰고 윤두수에게 장문포왜성 공격 건의, 9월 4일 장문로 공격에 합류하라는 지시가 내려옴.
41. 장문포왜성 선제 공격, 윤두수, 권율, 이순신, 전라도 의병장 김덕령, 경상도 의병장 곽재우 수륙병행작전 수행, 전함 2척 침몰 190명 사망, 선조의 공격중지 명령에 따라 중도에 그만 둠
42. 94년 장문포해전 이후 95, 96년 어떠한 해전도 발생치 않음
43. 김응남 아뢰길 '이순신의 공이 매우 크지도 않은데 조정에서 이순신을 원균의 윗자리에 올려 놓았기 때문에 원균이 불만을 품고 서로 협조하지 않는다 합니다.'
44. 원균을 충청도 병마사로 발령시킴
45. 1592년 7월 한산도대첩 이후 5년간 견내량을 건너지 못한것은 이순신 장군이 견내량을 틀어 막고 있었기 때문인데도 불구하고 선조는 이순신에 대해 "이순신은 적을 토벌하는 일이 없다. 그러니 내가 의심을 할 수밖에 없잖은가?"
46. 선조의 삐뚤어진 생각에 대해 이원익은 "원균은 전공이 있기 때문에 인정하는 것이지 그렇지 않다면 결단코 기용해서는 안 되는 인물입니다.", 김순명 "충청도 인심이 대부분 불편하게 여긴다고 합니다." 선조는 "원균은 마음은 순박한데 고집이 세기 때문이다." 류성룡 " 이순신에게 발끈하여 노기가 있습니다" "이순신도 원균에게 그러한가?" "이순신은 스스로 변명하는 말이 별로 없었으나 원균은 기색이 늘 발끈하였습니다", 선조 "내가 들이니 군사를 청하여 수전한 것은 원균이고 이순신은 따라간 것이니, 공을 이룬 것은 실로 원균에게 비롯하였다 한다.", 이원익 "이순신은 호남으로 적의 배가 돌진해 오면 적이 충만해질 우려가 있기에 늦게 출정했던 것입니다. 원균은 당최 많이 패하였으나 이순신만은 패하지 않고 공이 있었으므로 다투는 시초가 여기에서 일어났습니다."
47. 이순신을 내치고 원균을 세우려는 답을 정한 선조 앞에서 현명한 신하들이 제아무리 바른 소리를 해도 소용없는 노릇이었다.
48. 항왜자 요시라의 간계에 속은 선조, "대마도를 건너오는 가토 기요마사를 요격하라" 출동 명령을 내림
49. 부산과 대마도 사이에는 섬도 없고 함대의 정박지도 없는 상황.
50. 부산 왜영 화공 사건, 선조가 길길이 뛰며 이순신을 파직하려 드는 사건
51. 원균의 장계 " 다만 수륙의 일을 헤아려 말한다면 우리나라의 위무는 오로지 수군에 달려 있습니다...(중략) 원하건대 조정에서 수군으로서 바다 밖에서 맞아 공격해 적으로 하여금 상륙하지 못하게 한다면 반드시 걱정이 없게 될 것입니다. 이는 신(원균)이 쉽게 말하는 것이 아니라 전에 바다를 지키고 있어서 이런 일을 잘 알기 때문에 이제 감히 잠자코 있을 수가 없어 우러러 아룁니다. <선조실록 1597년 1월 22일>
52. 윤두수 "이순신의 죄상은 임금께서도 이미 통촉하시지만 이번 일은 나라의 인심이 모두 분노해 하고 있으니, (중략) 위급할 때에 장수를 바꾸는 것이 비록 어려운 일이지만 이순신을 체직시켜야 할 듯합니다. <선조실록 1597년 1월 22일>
53. 원균과 윤두수는 사돈지간, 윤두수와 선조는 사돈지간
54. 선조 "이순신을 용서할 수가 없다. 무장으로서 어찌 조정을 경멸하는 마음을 갖는가?"
55. 이순신 파직 교서 "이순신을 잡아올 때 원균과 교대한 뒤에 잡아올 것으로 말해 보내라. 또 이순신이 만약 군사를 거느리고 적과 대치하여 있다면 잡아오기에 온당하지 못할 것이니, 전투가 끝난 틈을 타서 잡아올 것도 말해 보내라. <선조실록 1597년 2월 6일>
56. 1597년 2월 25일 파직돼었음을 알게 되고, 26일 한양으로 압송길에 오름, 10여일 만에 한양 도착했다는 기록을 통해 말을 타고 이동하였음을 알 수 있다.
57. 이순신이 의금부에 갇힌 10여일이 지난 3월 13일 선조의 명령 "이순신이 조정을 기만한 것은 임금을 무시한 죄이고, 적을 놓아주어 치지 않은 것은 나라를 저버린 죄이며, 심지어 남의 공을 가로채 남을 무함하기까지 하며 방자하지 않음이 없는 것은 기탄함이 없는 죄이다."
58. "이렇게 허다한 죄상이 있고서는 법에 있어서 용서할 수 없는 것이니죽여 마땅하다. 신하로서 임금을 속인자는 반드시 죽이고 용서하지 않는 것이므로 지금 형벌을 끝까지 시행하여 실정으로 캐어내려 하는데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 대신들에게 하문하라" <선조실록 1597년 3월 13일>
59. 당시 조정의 분위기는 선조의 이순신에 대한 마음을 읽은 조정의 대신들은 이순신 구명에 관련된 정의로운 목소리를 내지 않았다. 하물며 류성룡조차 이순신 구명을 포기하였다.
60. 우의정 정탁이 구명 장문 올림.
61. 옥에 갇힌 한달여 후인 4월 1일 의금부에서 풀려남.
62. 아마도 선조는 '이순신 없이도 이 전쟁을 이겨낼 수 있을까?' 하며 원균을 사실 못 미더워하는 생각도 했을것이다.
63. 1597년 4월 3일 백의종군 시작, 6월 8일 초계의 권율 진영 도착, 도원수 권율에게 도착신고함
64. 이순신 파직 소식은 명과 일본에 전해지고, 휴전회담은 결렬되고 선조는 일본에 대한 선제 공격을 구상하게 됨. 새로운 삼도수군통제사 원균에게 출정명령을 내림
65. 이순신이 한산도에서 기거하면서 작전 회의를 주로 했던 운주당은 원균에 의해 풍악이 울리는 기생집으로 변해버림, 징비록에 "원균은 자기가 사랑하는 첩과 함께 운주당에 거처하면서 울타리로 당의 안팎을 막아버려서 여러 장수들은 그의 얼굴을 보기가 힘들었다. 술을 즐겨 날마다 주정을 부리고, 화를 내어 형벌에 대한 법도가 없었다."
66. 육군 30만이 안골포와 가덕도를 먼저 공격하게 해주신다면 제가 수군을 이끌고 부산포를 공격하겠습니다.
67. 권율 휘하의 육군 5000명을 원균의 수군에 합류시킴
68. 원균이 1597.7.7 부산 다대포 공격, 일본 세키부네 10척 격침시킴, 그러나 판옥선 30척 잃는 대형사고를 침
69. 이에 권율은 부하들이 보는 앞에서 원균에게 곤장을 쳤다.
70. 곤장을 맞은 원균은 휘하 제장들과 한마디 상의 없이 한산도 전 병력과 모든 함대를 출정시킴. 한산도 수비병력조차 남기지 않고.
71. 1597년 7월 14일 134척의 판옥선과 거북선 3척과 수많은 협선들이 한산도 출발. 하루만에 부산 앞 절영도에서 일본 첩보선 몇척을 발견하고 뒤쫓다가 10척의 판옥선 표류. 가덕도에 함대 정박. 400여 명 하선했으나 매복중인 일본군에 놀라 원균은 400여명의 조선군을 버리고 도망침. 거제도 영등포에서 정박.
72. 1597년 7월 15일 병사들은 체력적으로 지쳤고 물과 식량도 부족한데 보급도 쉽지 않은 상황에서 한산도로 회군했어야 했는데
73. 원균은 패전과 무능의 책임을 져야 할 상태에서 한산도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74. 그래서 원균은 거제도와 칠천도 사이의 칠천량 해협에서 하룻밤을 더 보내기로 결정했다.
75. 원균의 이 결정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결정이였다. 칠천량 해협 양쪽에서 일본군이 포위 공격하게 된다면 조선 수군 전체가 최악의 상황으로 몰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였다.
76. 다른 지휘관들 역시 칠천량에서 머무르는 상황이 위험하다는 것을 알고 원균에게 면담을 청했으나원균은 분노의 술만 들이킬 뿐 소통을 거부했다.
77. 이 상황에 대해 항명을 했던 이가 경상우수사 배설이였다. 배설은 12척의 판옥선과 함께 칠천량 조선군 진영 이탈했다.
78. 7월 15일 밤 칠천량 해협 양쪽에 척후선을 세웠으나모두 잠에 곯아 떨어졌다.
79. 이 때 일본군의 소형 전투선들이 정탐해갔지만 조선 수군은 눈치채지 못했다.
80. 칠천량의 조선군은 소리없이 일본의 대규모 함대에 의해 양쪽에서 포위되고 있었다.
81. 1597년 7월 16일 새벽. 포위망을 샂춘 일본군의 기습이 시작됨. 소리 없이 갑판 위로 뛰어올라 칼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판옥선들은 서로 부딪치면서 난파되었다.
82. 전라우수사 이억기와 충청수사 최호는 칠천량 해협을 간신히 빠져 나와 진해만으로 도망쳤으나 곧 다시 포위되어 백병전을 치르다 전사.
83. 통제사 원균은 고성쪽으로 퇴각을 시도했고 춘원포까지 살아서 도착할 수 있었지만 원균은 또 판옥선을 버렸다. 그 후 원균은 일본군의 칼에 죽었는지 살았는지 알 수가 없다.
84. 징비록에 의하면 '원균은 배를 버리고 언덕으로 기어올라 달아나려고 했으나 몸이 비대하여 소나무 밑에 주저앉고 말았다. 혼자서 도망치던 원균이 왜적에 죽었다고도 하고 도망쳐 죽음을 모면했다고도 하는데 정확한 사실은 알수가 없다.'
85. 이 칠천량해전은 임진 왜란 발발 이후 단 한번의 패전 없이 강력했던 조선 수군이 궤멸되었던 해전이였다.
86. 일본의 <<정한위략>>에 의하면 이날 134척의 판옥선 중 122척이 불타거나 침몰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배설의 12척이 살아서 결국에는 이순신에게 돌아가니 교차 검증이 된 셈이다.
87. 이렇게 칠천량해전은 최고 지휘관의 역량이 전투 결과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가 될 것이다.
88. 이 패전 소식을 전해 들은 선조는 "한산을 지키면서 호랑이가 버티는 듯한 형세를 보였어야 했는데...(중략) 이 일은 어찌 사람의 지혜만 잘못이겠느가. 실로 하늘이 한 일이니 어찌하겠는가."
89. 한심하기 짝이 없는 선조
90. 이 후 일본군은 전라도를 휩쓸기 시작했고 수많은 조선인의 코를 베어 갔다.
91. 일본 교토에는 조선인 코 13만 개의 무덤이 도요토미 히데요시 신사 앞에 초라하게 묻혀 있다. 지금은 이를 귀무덤이라 한다.
92. 원균의 묘는 평택시에 위치해 있다.
93. 정유재란이 시작된 계기는 칠천량해전이었다. 친천량의 패배를 자초하고 조선의 바다와 호남을 지켜내고 있었던 조선 수군을 궤멸시킨 주범은 원균이다.
94. 이는 곧 정유재란의 주범이기에 원균은 정유재란 당시 죽은 원혼들 앞에 석고대죄를 해도 부족한 것이다.
95. <선조실록 1598년 4월 2일. 사관의 논평> 원균이라는 사람은 원래 거칠고 사나운 하나의 무지한 위인으로 당초 이순신과 공로 다툼을 하면서 백방으로 상대를 모함하여 결국 이순신을 몰아내고 자신이 그 자리에 앉았다. 겉으로는 일격에 적을 섬멸할 듯 큰소리를 쳤으나 지혜가 고갈되어 군사가 패하자 배를 버리고 뭍으로 올라와 사졸들이 모두 어육이 되게 만들었으니 그때 그 죄를 누가 책임져야 할 것인가. 한산(칠천량)에서 한 번 패하자 뒤이어 호남이 함몰되었고 호남이 함몰되고나서는 나랏일이 다시 어찌할 수 없게 되어버렸다. 시사를 목도하건대 가슴이 찢어지고 뼈가 녹으려 한다.
96. 이순신은 칠천량해전의 패전소식을 전해 듣고 울음을 참지 못하고 흐느껴 울었다.
97. 내눈으로 직접 확인해야겠습니다.
98. 1597년 7월 19일 단성, 20일 진주, 21일 노량까지 강행군
99. 이순신을 찾아온 군사와 백성들이 "원균의 살점이라도 뜯어 먹고 싶습니다."
100. 칠천량에서 도망하여 살아난 경상우수사 배설과의 만남. "12척의 판옥선은 어디에 숨겨두었소?" "내가 왜 판옥선의 향방을 당신에게 말해야 하오?"
101. 선조의 삼도수군통제사 재임명 "임금은 이와 같이 니르노라. 생각하건대 그대의 명성은 일찍이 수사로 임명되던 그날부터 드러났고, 그대의 공로와 업적은 임진년의 큰 승첩이 있은 후부터 크게 떨쳐 변방의 군사들은 마음속으로 그대를 만리장성처럼 든든하게 믿어왔었는데, 지난번에 그대의 직책을 교체시키고 그대로 하여금 죄를 이고 백의종군하도록 했던 것은 역시 나의 모책이 좋지 못하였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며, 그 결과 오늘의 이런 패전의 욕됨을 만나게 된 것이니, 더 이상 무슨 말을 하리오! 더이상 무슨 말을 하리오!
102. 7월 18일 부터 8월 19일까지 60km를 이동하며 조선 수군 재건을 위해 많은 사람을 만나고 패잔병들을 끌어 모았다.
103. 선조의 교지 '수군의 전력이 약하니 권율의 육군과 합류해 전쟁에 임하라'
104. 이순신의 장계 "지금 신에게 아직 12척의 전선이 있습니다. 전선의 수는 비록 적으나 미천한 신이 죽지 않았으므로 적들이 감히 우리를 업신여기지 못할것입니다."
105. 이순신의 장계를 받아본 선조 "이순신 이 자가 또 왕명을 거역하는구나."
106. 1597년 8월 27일 어란진해전과 벽파진해전, 어란진 8척, 벽파진 13척 일본 전함이 도망감
107. 울돌목 울명 명량,
108. 일본은 어란진에 수백척의 함선
109. 1597년 9월 15일밤 필사즉생, 필생즉사, 능히 길목에서 한 명이 천 명을 막아낼 수 있으니 우리도 그렇게 막아낼 수 있다.
110. 1597년 9월 16일 새벽 300여척의 일본 함대가 명량으로 들어섰다는 첩보. 이순신의 13척 판옥선
111. 육지인 해남과 진도섬 사이 울돌목 300미터, 울돌목 끝나는 지점에 판옥선 13척이 일자진 형성
112. 12척의 판옥선이 뒤쳐저 있고 이순신 대장선만이 앞서가고 있다. 10여척의 판옥선은 울돌목의 입구에서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고, 대장선으로 보이는 배만 울돌목의 역류를 헤치며 일본 함대를 향해 다가가고 있었다.
113. 1대 133의 전설적인 전투가 시작된다.
114. 거제 현령 안위와 중군장 김응함이 합세
115. 안위의 판옥선에서 백병전
116. 정오부터 물살이 바뀌어 일본함대쪽으로 거세게 흘러간다. 자기편의 난파선 흔적들이 몰려간다.
117. 나머지 9척의 판옥선들도 와서 싸우기 시작
118. 죽은 구루시마의 목을 베어 매달자 일본군들이 혼비백산하여 도망
119. 와키자키 후퇴 명령, 후퇴하면서 서로 부딫쳐 난파된 함선이 더 많은 지경
120. 일본군 함선 31척 침몰, 92척 난파, 3000명 사망
121. 1598년 5월 명나라 수군이 조선에 들어옴
122. 1598년 11월 19일 노량해전 일본 전함 200여척 침몰, 150여척 반파, 100여척 나포, 1만명 사망, 조선 판옥선 4척 침몰, 명군 전함 29척 격침, 조선 300여명 전사, 명군 2800여명 전사
123. 이순신의 영구는 마지막 삼도수군통제영이 있었던 고금도에 묻혔다. 20여일 후에 다시 아산으로 옮겼다.
124. 이순신 장군 묘소에 가본 적이 있는가? 갈 때마다 항상 혼자였다. 그러나 일본의 야스코니 신사에는 평일에도 사람이 북적거린다. 그러나 현충사는 한적함이 좋다. 그게 서글프다.
125. <효종실록 1659년 윤3월 30일> 아침에 이순신의 비문을 보았는데, 죽을 힘을 다하여 싸우다가 순절한 일에 이르러서는 눈물이 줄줄 흘렀다. 이는 하늘이 우리나라를 중흥시키기 위하여 이런 훌륭한 장수를 탄생시킨 것이다. 원균의 패배가 있었으나 그 뒤 순신이 대적을 격파하였으니, 참으로 쉽게 얻을 수 없는 인재다.
126. 숙종이 쓴 <현충사 제문> 중에서 절개에 죽는다는 말은 예부터 있었지만 제 몸 죽고 나라 살린 것은 이 분에게서 처음 보네.
127. 정조 <홍재전서> 이순신의 경우는 참으로 천고 이래의 충신이요 명장이다. 그가 만약 중국에 태어났더라면 한나라의 제갈공명과 자웅을 겨룬다 하더라도 과연 누가 우세할지 장담할 수 없을 것이다. 그의 명성과 의열은 아직도 사람에게 흠모하는 마음을 일으키게 한다.
128. 정약용의 <경세유표> 우리나라의 장재로서는 예전에는 김종서를 칭하고 근세에는 이순신을 칭하는데 종서는 충신이고 순신은 효자였다.
129. 일본의 사토 테츠타로 <제국국방사론> 역사상 최고의 제독은 동방의 이순신과 서방의 호레이요 넬슨이다. 넬슨은 인간적, 도덕적인 면에선 이순신에 떨어진다. 조선에서 태어났다는 불행 덕분에 서방에 잘 알려져 있지 못하다.
130. 일본의 도고 헤이하치로는 러일전쟁 승리 직후 축사를 듣고 나서 이렇게 말했다 <일본 조선사 연구소> 나를 넬슨에 비하는 것은 가하나 이순신에게 비하는 것은 감당할 수 없는 일이다.
131. 제2차 세계 대전의 영웅이였던 버나드 몽고메리 <전쟁의 역사> 조선에는 이순신이라는 뛰어난 장군이 있었다. 이순 신 장군은 전략가, 전술가이며 탁월한 자질을 지닌 지도자였을 뿐만 아니라, 기계 제작에도 뛰어난 재능을 지니고 있었다.
132. 해전사 전문가이자 해군 제독이었던 영국의 조지 알렉산더 발라드 제독은 영국인의 자존심은 그 누구도 넬슨 제독과 비교하길 거부하지만, 유일하게 인정할 만한 인물을 꼽자면, 한반도의 이순신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실수가 없었으며 그야말로 모든 면에서 완벽해 흠잡을 점이 전혀 없을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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